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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안문(톈안먼) 민주화시위 상징 '탱크맨'을 아시나요? 왕웨이린(王維林)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by 신림83 2020. 12. 2.

천안문(톈안먼) 민주화시위 상징 '탱크맨'을 아시나요?  왕웨이린(王維林)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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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문 민주화시위 중국에서 금기화 되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인들도 다 알면서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

 

모른다고 말하고 황급히 지나가는 중국인
놀라며, 말을 줄이며 황급히 이동하는 중국인

그들은 무었을 본 것일까요?

정답은

탱크맨

천안문 탱크맨

중국인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모른 척해야 하는 것으로요.

 

천안문 사태

천안문 6.4 항쟁

 

천안문 민주화 시위

등으로  불리우는 그 사건

 

상하이대 학생들이 베이징에 연대한다는 ㄸ스을 건 현수막

1989.04.15 - 1989.06.04 일간 있었던 일

베이징을 포함한 중국 전역을 400개의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결과는 무력진압으로 인한 큰 유혈사태가 발생했죠..

 

천안문 6.4 항쟁은 1989년 6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이다.
 

 일반적으로 천안문사태라고천안문 사태라고 말하면 이 항쟁을 말한다. 인민해방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최소 500명이 사망하였다. 천안문 사태라고 주로 부르지만 이는 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이는 말이다.

 

천안문 광장

그 당시 천안문 광장에는 2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 등을 구호로 외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식을 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시민들이 점점 더 몰려듭니다.

 

베이징의 공안들 또한 민주회 시위를 지지하는 행렬에 참여

시위는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인원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며, 정부에 부담을 주게 됩니다.

 

처음부터 군대가 온건 아니다.

중국 정부가 바로 군대부터 넣었다 이런건 아닙니다.

 공산당 서기 자오쯔양이 학생들과 대화에 나섰고, 관련 두 번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강경파 당시 총리 리펑과 학생 대표 왕단, 어얼카이시 등과 만남이 있었지만 서로의 요구사항이 틀려 합의하지 못합니다.

 자오쯔양 서기관이 다시 보복이 없을테니 해산하라는 요구를 하지만 학생들은 단호히 거절하게 되고, 이후 군부대가 등장하게 됩니다.

 

인민의 군대는 인민을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인민의 군대 가 인민을 향해 포신을 겨누며 광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주식이었던 덩샤오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는 명령을 했다는 것이, 당시 총리 리펑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누가 참여했는가?

 초기에는 지식인 위주, 대학생이 주도했지만, 후기에는 각계각층 시민들이 참여합니다. 상인도, 노동자도, 언론, 의사, 대학교수, 경찰, 공무원 아이부터 노인까지, 이 당시는 전 세계가 자유화의 물결이 범람하던 때였고, 이 소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며, 미국 유럽, 그리고 소련 매체들도 시위 지지를 표명합니다.

유혈사태를 예상하고 민주화시위는 진행됐는가?

 많은 사람이 탱크가 올라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최루탄, 강제해산 등 리미트라 생각했지만, 정말 탱크를 앞세운 인민을 해방했던 군대로 다시 인민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많은 지식인이 잡혀 들어가거나 중국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상징

탱크맨

 

탱크맨

무려 탱크를 단신을 몸으로 막아섰던 남자.

 

탱크가 오히려 회피하여 지나가게 만드는 그 남자

탱크가 피해 가려 했던 그 남자

 

 

탱크에 오르는 그 남자

어떻게든 탱크를 막아보고 싶던 그 남자

 

 

진격을 막고 싶던 그 남자

왕웨이린(王維林) 이란 이름을 그 남자.

 

위의 사진들은 보신 분이 꽤 있을 것입니다.

그가 막아선 탱크는 5대 정도 되어 보이죠?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홀로 군대를 막으려 했던 그

그 뒤로 도열한 수많은 탱크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민주화 시위의 상징 탱크맨은 아직도 중국에 살아서 거주 중이란 것입니다.

 오랫동안 행방에 대한 정보가 없어, 사진에 나온 이후 탱크에 압사당했다. 그 이후 끌려갔다. 등등 루머만 무성했지만, 실제로는 그는 사건 이후로 중국에 계속 거주하며, 생존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중국을 떠난 역사가 없으며, 큰 문제없이 살고 있다고 전하며, 언론 노출은 극도로 꺼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자보 문화는 중국의 것?

들어서돈 안되고 말해서도 안되는 천안문

천안문사태 때 활발했던 대자보 문화

하지만 중국인을 이를 들어서도 안된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은 많이 살아 있습니다.

 운동의 막바지 중국 정부는 생존해 있는 학생 대표 21일은 지명수배 하지만, 홍콩에서 일명 노랑새작전이라고 알려진 특수 구출 작전을 실행해 홍콩으로 이주시킵니다. 그 이후 홍콩에 살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거나 등등을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의무이니까요

흠...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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